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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은 요즘 가히 글쓰기가 두려운 시대이다. 짧은 몇 줄 글로 사회의 여론 전반이 좌로도 휘고, 우로도 기우는 시대이다. 물론, 그래서 글쓰기의 무게감이 한층 더 깊어지는 결과가 온다면 나쁜 일은 아니다. 그러나 상황은 자꾸 글쓰기 무용론(無用論)으로 흐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환멸과 냉소에 한번 빠진 다음에는 돌이키기가 쉽지 않은 법이다.


말쟁이와 글쟁이 중 누가 더 나쁜가? 우열을 가리기 어려울 듯하나, 같은 영향력이라면 말쟁이의 파괴력이 한 시대, 한 장소에 머문다면 글쟁이의 그것은 시공을 넘나드는 점에 있어 그 죄질이 한 급 더 높다고 보겠다. 물론 이 말은 그대로 뒤집으면 선한 영향력에 있어서도 글쟁이가 한수 높다고 말할 수 있겠다.1) 


좋은 글이란 어떤 글인가? 나는 아래의 몇 가지 구분으로 내가 생각하는 좋은 글의 범주를 설정해 보고자 한다.


절박한 글쓰기

도무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 수 없는 글이 싫다. 대체로 대학 리포트에서 자주 발견되는데, 자신도 무슨 말을 하려는지 모르는 채 끝없이 빈칸을 메워 가는 글쓰기에서 발견되는 버릇이다. 신문의 성의 없는 논설과 칼럼들에서도 자주 발견되고, 권위의식과 특권의식에 한껏 물이 오른 관료들과 지식인들의 말투와 글투에서도 거침없이 드러나는 것이 이것이다. 도대체 자신에게도 그 글을 쓰지 않으면 안 되는 절실한 이유가 없는데, 독자들이 그따위 글을 읽기 위해 시간을 할애해 줄 것이란 엄청난 착각은 어디서 나올 수 있는 것일까.


두 가지 이유에서 비롯된다. 첫째는 자신이 관심이 없는 주제이기 때문이다. 할 말이 없기에 글이 헤매는 경우이다. 그것을 말하고자 하는 의지가 절박하지 않기 때문이다. 내용보다 치장으로 때우는 글들이 그런 경우에 해당한다. 이런 경우 해법은 단순하다. 글을 쓰지 않으면 된다. 나는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하루 종일 우리가 나누는 대화를 다 분석해 본다면, 아마도 80% 정도는 바로 쓰레기통에다 처박아도 아깝지 않을 말들을 하고 사는 것 같다. 마찬가지로 우리 주변을 맴도는 수많은 글들도 자세히 분석해본다면 80% 이상은 그것이 존재하든, 하지 않던 우리 인생에 하등 영향을 주지 못하는 것들로 판명날 것이다. 그런 글은 독자라면 무시해도 상관없고, 필자라면 생산하지 않아도 무방한 것이다.


둘째는 정돈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고의 훈련이 부족하거나, 표현력이 딸려서 핵심을 잡아내지 못하고 주변을 맴도는 경우가 있다. 이는 훈련이 필요한 경우이다. 자신에 대한 성찰과 생각을 말이나 글로 끄집어내는 훈련이 필요한데, 사실 이것이 쉽지 않다. 여느 훈련이나 마찬가지로 여기에는 육체적 단련과정이 필요하다. 쉽게 말해 ‘노가다’이다. 절대량을 써보는 과정, 쓴 것을 호되게 다듬질하는 과정, 읽은 사람들을 통해 전혀 예상치 못한 반응이 나오는 것을 받아들이는 과정 등이 필요하다. 물론 머리 속으로 들어간 것이 적으니 머리에서 나올 것도 별로 없는 경우는 논외로 치겠다.


여성이 남성보다 논리적 사고가 부족한가, 그렇지 않은가를 놓고 여자 후배와 토론을 했던 적이 있다. 흔히 남성은 논리적 사고, 여성은 감성적 사고를 한다고들 한다. 어느 정도 맞는 말이긴 하겠으나, 과연 그렇게 말해도 되는가를 짚어보자는 자리였다. 그 친구가 한 말 한마디가 기억에 남는다. “여성들의 사고가 파편적이라면 그 이유는 그들의 삶이 파편화 되어 있기 때문 아니겠어요?” 그 말이 울림이 컸다. 삶이 정돈되어야, 그 삶에서 건져 올리는 글(말)이 정돈되어 있을 것이란 말은 결국 ‘논리적’인 것을 가장 좋은 글의 덕목으로 주장하는 것과는 다른 말이다. 구태여 ‘논리적’이란 표현이 아니라, ‘정돈’이란 말에 좀더 애착이 가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이다. 남성과 여성, 혹은 다양한 사회적 조건 속에서 배태된 글의 다양성은 ‘논리’ 때문이 아니라 서로 다른 다양한 질서 속에 잘 ‘정돈’되었기에 아름다운 것이다. 



정직한 글쓰기

저자가 글 뒤로 숨는 경우가 있다. 영국에서 유학을 할 때 그런 것을 처음 배웠다. 일종의 논문형 글쓰기인데, 절대 ‘나(I)’를 주어로 하는 문장을 쓰지 말라는 것이다. 수동태로 만들거나, 다른 사물을 주어로 삼거나, 가(假)주어를 사용해야 문장이 ‘객관적’이라고 했다. 물론 가르치는 사람도 안다. 그것은 하나의 관습일 뿐 결국 그 문장의 발언주체를 지울 수는 없다는 것을. 이런 관행에 반발해서 오히려 ‘나’를 주어로 삼는 문장을 복원해야 한다는 흐름도 있다. 나는 그 주장이 꽤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실제 글을 써보면 자주 그 문장의 책임을 피하고 싶어지는 순간이 있다. 우리사회에서 자주 발견되는 관행으로는 주어가 ‘우리들’이거나 ‘국민들’이 될 경우, 좀 긴장하고 따져보는 것이 좋다. 대체로 발언주체의 소망을 집단 전체의 이해관계로 호도하는 경우에 이런 ‘거대한’ 주어가 잘 등장한다.2)


인터넷 글쓰기에서 실명(實名) 사용은 매우 큰 위험을 감수하는 일이다. 어느 정도의 익명성이 보장하는 자유로움이 또한 존재한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글쓰기에서 자기책임성이 배제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3) 쓰여진 글은 이미 저자의 손을 떠나 독자적인 생명을 갖는다고 한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 저자는 그 아이를 낳고, 이름을 지어주는 어미와 아비로서의 역할까지는 해야 한다. 비록 그 아이가 나가서는 다른 이름을 갖고, 기대와 다른 방향으로 살아가더라도 그까지 하는 것은 부모의 도리이자 윤리이다.


정직한 글쓰기가 잘 되지 않는 이유는 뜻밖에도 공부가 부족해서 그런 경우가 많다. 자신이 다루는 내용에 대해 제대로 된 지식이나 정확한 이해가 부족한 경우 위험을 감수하는(risk-taking) 지점까지 나아가지 못하고 경계선 안쪽에서 머물러 버린다. 정직한 글쓰기는 단순히 용기의 문제가 아니다. 지나치게 초반부터 선악의 판단이 앞서면 글이 성급해지고, 논리적 비약이 쉽게 발생한다. 과도한 영웅심이 발동하기도 한다. 정직한 글쓰기란 윤리적 가치판단을 먼저하고 글을 써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끝까지 ‘내가 틀릴 가능성’을 열어놓고 그 가능성을 줄여나가는 방식으로 글을 쓰는 작업이다. 자기 자신에 대한 성찰과 사안에 대한 이해가 모자라는 가운데 일단 ‘질러놓고’ 보는 글을 흔히 ‘정직’한 글로 오해를 하지만 사실상은 ‘의도는 좋았으나, 기대에 못 미치는’ 경우가 많다. 물론 완벽한 지식이나 이해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글쟁이들은 그런 걸 추구하고 살도록 저주받은 존재들이 아닐까. 그토록 많은 글쟁이들이 열등감, 완전주의, 자기혐오 등과 벗하며 살고 있다는 사실은 그들 자신에게는 비극이지만 사회 전체로 보아서는 건강한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가끔, 아주 가끔 든다.4)



효율적 글쓰기

‘효율’이란 말은 경제성을 생각하게 하고, 이는 곧 ‘적은 단어를 사용해서 많은 내용을 전달하는 기술’ 정도를 연상시킨다. 틀린 것은 아니나, 내가 말하고 싶은 핵심은 이런 것이다. 만약 우리가 병이나 사고를 당해서 말을 하거나 글을 쓰는 것이 매우 곤란한 상황에 처해있다면, 그때 우리가 한 글자, 한 단어에 쏟아 넣는 정성과 집중력이란 대단히 농축된 것이 될 것이다. 거추장스런 수식어를 제외하고 딱 필요한 핵심만을 전달할 것이다. 한 단어의 힘을 최대한 증폭시켜서 사용할 것이 분명하다.

글이란 결국 단락으로 나뉘고, 문장으로 나뉘고, 단어로 귀결된다. 저자의 추상적인 생각은 결국 구체적인 단어의 선택에서 이러저러한 모호함을 걷어내고 선명하게 드러난다. 물론 단어의 선택에서 헤매기 시작하면, 그런 단어를 모아 놓은 문장이 명료한 생각을 전달할 리가 없고, 그런 문장이 모여 제대로 된 생각을 직조(織造)해 낼 수가 없다. 글 내부에 이런 긴장이 유지된다면 그 글이 아무리 길어도 독자들은 한달음에 읽어낸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짧은 글이라도 한 문장 안에서도 천 리를 헤멜 수 있다. 



윤리적 글쓰기

글이란 글쓴이의 정확한 내적 반영이란 측면에서 본다면 매우 자기 고백적이고, 엄밀한 대상이다. 그런데, 모든 글이 다 그런 것은 아니다. 글쓴이의 내면세계를 얼마나 잘 반영했느냐 보다는 그 글로 인해 발생할 효과(effect)에 더 주목하는 글들이 있다. 각종 글에 존재하는 정서적 톤을 보아도 차이가 난다. 즉, 즉 객관적이고 엄정한 느낌을 시종일관 깔고 있는 글, 시비의 대상이 된 사안에 대해 선호를 분명히 하고 설득 내지는 선동을 의도하는 글, 혹은 마냥 한가롭고 재잘거리는 느낌으로 맑고, 밝고, 따뜻한 글도 존재한다. 글이 내면세계의 반영이라면 이런 정서적 톤은 글 자체로부터 기인하겠으나, 효과에 주목하는 글의 정서는 글쓴이가 문체와 더불어 의도적으로 선택하기도 한다. 이 가운데 특히 전투적 글쓰기와 풍자적 글쓰기에 대해서는 좀 생각을 해둘 필요가 있다.5) 이 둘은 통상 글쓰기의 관행에서 볼 때는 전략적으로 선택한 입장이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 이런 글쓰기를 선택할 것인가, 혹은 그런 글쓰기에서 고려해야 하는 특별한 지점이 있는가 하는 것이다. 


전투적 글쓰기의 미덕은 승리에 있다. 그리고 우리는 많은 ‘싸움의 기술’을 알고 있다. 글쓰기에서도 예외 없이 이런 것들이 사용된다. 상대의 논리적 오류나 말실수를 유도하는 기술, 비난과 압박을 가해 평정심을 깨뜨리는 기술, 자신의 약점을 은폐하는 기술, 여론에 호소해 위기국면을 탈출하는 기술, 무시로 일관함으로써 힘과 권위로 억누르는 기술 등등. 대체로 이런 싸움은 어느 한편이 결정적으로 불리해지기 전에 상대를 비난하며 링을 뛰쳐나가는 것으로 종료되곤 한다. 그리고 장외전이 지루하고 불쾌하게 지속되기 마련이다. 전투적 글쓰기의 종말이 이렇게 되지 않으려면 그 미덕은 ‘승리’가 아니라 ‘공정함’에 있어야 한다. 게임의 룰을 어기고 장외로 도는 사람이 비난받는 경우는 게임의 룰이 공정했을 때뿐이다. 물론 언제나 패자에게는 심판이 편파적이었고, 규칙은 불공정한 법이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오랜 시간을 두고 보면 누가 승자고 패자인지 분명하게 갈린다. 


풍자적 글쓰기의 미덕은 그러면 무엇인가. 그것은 상대의 인격을 일방적으로 묵사발 내는 것이 아니다. 서양이나 동양이나 풍자의 미덕은 비판자나 비판당하는 자나 최종 판결이 어느 쪽으로 떨어지느냐를 보기 이전까지는 함께 웃고, 즐길 수 있는 보편적 공감대를 불러일으키는 힘에 있었다. 비록 그 결론은 권력자의 심각한 불쾌감과 노여움을 살지언정 그 결론에 이르는 과정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공감의 심성 위에 축조되었어야 한다.6) 전복적(subversive) 미학의 핵심은 상대방의 힘을 이용하는 것. 약자가 강자의 힘을 이용하고, 강자는 자신의 힘에 의해 거꾸러짐을 당하는 것. 그것에서 반전과 전복의 묘미가 산다.  



* 이 원고는 2006년 1월 IVP 문서학교에서 행한 '글쓰기' 강의안을 약간 다듬은 것이다.



1) 말과 글, 시와 산문에 대한 날카로운 구분을 시도한 월터 브루그만(Walter Brueggemann)의 고전, <예언자적 상상력> (대한기독교출판사, 1981)를 권한다. 그는 여기에서 플라톤이 ‘공화국에서 시인을 추방해야 한다’고 한 이유가 산문이 갖지 못한 시의 혁명성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시대가 구획한 울타리를 넘나드는 자유분방함이 시와 시인의 본성이고, 그것은 언제나 체제에 대한 위협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바로 그 시적 자유가 예언자들이 체제와 불화한 근본 이유였다고 지적한다.


2) 예들 들면, 가짜 줄기세포연구로 물의를 빚었던 황우석 교수의 발언에 유독 ‘대한민국’ ‘조국’ ‘국민’ 등의 거대서사가 잘 등장하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보면 쉽게 이해가 된다. 자신의 행동에 대한 ‘주체’가 되기를 거부하고 그 자리에 ‘조국’과 ‘민족’을 놓음으로써 가까이는 연대 책임을, 멀리는 집단적 책임회피를 조장하는 것이다. 


3) 최근 인터넷 댓글의 무책임한 발언에 대한 법적 책임을 묻는 경우가 많아졌다. 꼭 법적인 제재가 바람직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인터넷 공간이 무한한 발언의 자유를 보장하는 곳이 아니라 책임 있는 발언의 장이 되어야 한다는 점은 공유되어야 하겠다. 특히 ‘명예훼손’과 관련된 법률적 해석은 관련 내용이 사실이더라도 공공의 이익과 관련 없이 당사자의 인격을 훼손한 경우 그 책임을 묻고 있다.


4) 계간지, 월간지, 격주간지 까지 편집장을 해보았는데, 언제나 마감 때면 인스탄트 커피를 입에 달고 살았다. 이래서야 담배 피는 것과 무슨 차별성이 있나 싶을 정도였다. 몸과 마음이 이런 중독성 기호품에서 자유로운 가운데 글이 나올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결국 시간과 싸우는 상황에서는 몸이 그 긴장감을 버텨내도록 채찍질 하게 된다. 나는 그것이 신앙적 삶과 괴리되는 것이라고 생각지 않는다.


5) 90년대 이후 이런 글쓰기가 유행하게 된 것은 두 사람의 뛰어난 글쟁이 덕분이다. 강준만과 진중권. 각자는 무수히 많은 아류 글쓰기 추종자들을 탄생시켰다. 


6) 한겨레신문에 칼럼을 써온 김두식 교수의 글이 갖는 묘미의 핵심은 독설적이지 않은 풍자성에 있다고 본다. 좌우로 확연히 갈라진 한국사회에서 그 사이를 가로지를 수 있는 흔치 않은 지점에 그가 서 있을 수 있는 비결은 따뜻함을 잃지 않는 심성과 한쪽 편에 서 버리지 않는 기질적 무당파성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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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간결한 글

조선일보 김대중 전 주필을 놓고 누군가 평하기를, 점과 점 사이를 잇는 최단거리를 직선이라고 하는 것처럼 그의 글은 논지에 이르는 최단 거리를 이어가는 글을 쓴다고 했다. 김대중씨의 글이 그러한 지에는 동의하지 못하겠으나, 좋은 글에 대한 특징을 참 잘 포착한 표현이란 생각은 했었다. 간결성, 혹은 단도직입적 글쓰기. 할 말을 에둘러가지 않고 정면으로 치고 들어가는 글. 나는 그런 글이 좋다. 그런 글이 성실하고, 정직하다.

 

간결하게 글을 쓰려면 우선 수식어를 줄여야 한다. 문장도 단문(simple sentence)형의 단순한 구조를 사용해야 한다. 단어를 고르고 골라야 한다. 이를테면, 가장 단순한 문장 구조에 빛나는 단어 몇 개를 박아 넣는 식이 된다. 그런 글이 사람을 울린다. 사정없이 사람을 때린다. 그런 글은 시()에 가까운 운율과 논법을 지닌다. 김훈 같은 사람의 글에서 가끔 그런 느낌을 받는다.

 

간결한 글을 쓰려면 생각의 핵심을 짚어낼 수 있어야 한다. 간절한 질문이 무엇인지 정직하게 묻고 답할 수 있어야 한다. 가방 끈이 길어질수록 핵심을 회피하는 글쓰기의 테크닉이 늘어간다. 도를 닦는 사람들은 선문답(禪問答)이란 걸 했다지 않는가? 생각이 깊어지면 말이 주는 법이다. 역으로, 말수를 줄이면 생각이 깊어지는 것도 맞다. 핵심은 우리의 분주한 일상과 산만한 생활 습관 속에서 어떻게 단순한 삶을, 단순한 생각을, 단순한 말을 지켜낼 수 있느냐에 달려있다.

 

2. 주장과 정보의 균형

<복음과상황> 99년부터 편집위원으로 이름을 걸어놓고 있었고, 2004년에는 편집장 노릇을 했다. 책머리에 편집장의 글을 쓰는 재미가 적지 않았는데, 그 첫 호에 이렇게 썼다. 주장과 정보의 균형을 이루겠다. 90년대 중반에 작은 회보를 내면서 다짐했던 원칙이었다. 주장만 강한 글은 가슴은 있으나 머리가 없어 보였고, 정보만 있는 글은 머리는 큰데 가슴은 비어 보였다.

 

글쓰기를 요리에 비유한다면 정보는 재료이고, 주장은 요리법이라고 볼 수 있다. 좋은 재료를 써야 기본적으로 좋은 요리가 나온다. 그러나, 좋은 요리는 그런 재료들의 단순한 합()이 아니다. 요리사 특유의 손맛과 비장의 양념, 혹은 조리방법이, 그 요리에 다른 모든 음식과 구별 되는 특별함을 부여한다. 그러므로 좋은 글쓰기를 위해서는 새로운 실험도 많이 해야 하고, 오랜 시간에 걸쳐 많은 양을 써보는 숙련의 과정도 꼭 있어야 한다. 좋아하는 작가들의 문체를 흉내 내 보기도 했고, 마감시간에 몰려 많은 양의 원고를 기계처럼 써본 경험도 있었는데, 이런 과정이 다 도움이 된다.

 

정보를 습득하고, 주장을 다듬는 데는 독서만한 것이 없다. 사실 글을 쓰는 사람이야말로 가장 부지런한 독서가여야 한다. 한양대 정민 교수가 쓴 <미쳐야 미친다 (不狂不及)>에 보면, 김득신이란 사람의 독수기(讀數記)란 글이 소개되어 있다. 당대에 소문난 둔재였던 김득신은 자신이 1만번 이상 읽은 책만 기록에 남겨놓았는데, 그 내용의 일부가 이렇다.

<백이전> 11 3천번을 읽었고, <노자전>, <분왕>, <벽력금>, <주책>, <능허대기>, <의금장>, <보망장> 2만번 읽었다. <제책>, <귀신장>, <목가산기>, <제구양문>, <중용서> 1 8천번, <송설존의서>, <송수재서>, <백리해장> 1 5천번 (1만번 이상 읽은 책은) 모두 36편이다. 갑술년(1634)부터 경술년(1670) 사이에 <장자> <사기>, <대학> <중용>은 많이 읽지 않은 것은 아니나, 읽은 횟수가 만번을 채우지 못했기 때문에 <독수기>에 싣지 않았다. 만약 뒤의 자손이 내 <독수기>를 보게 되면, 내가 책 읽기를 게을리하지 않았음을 알 것이다.

정민 교수는 그가 나중에는 문장으로 조선후기에 손꼽히는 인물이 되었다고 쓴다.

 

요즘 대학생들의 리포트는 웬만한 정보는 다 네이버 지식검색을 인용하고 있다. 개념의 정의나, 해당 사례, 통계 등을 다 그렇게 처리한다. 자세히 살펴보면, 그 정보의 신뢰성이 그리 높지 않거나 일관성이 없는 짜깁기인 경우가 많은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앞뒤가 모순되는 정보를 죽 나열해 놓고 있다. 홍세화씨는 무식한 요즘 대학생들이란 글을 써서 그런 세태를 꼬집은 적이 있다. 옛날에는 책을 읽지 않으면 자신이 무식하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런데, 요즘은 인터넷 정보의 홍수 시대를 살다 보니 자신의 무식을 인정하지 않는다. 나는 그의 말에 동의하는 편이다. 요즘 젊은이들이 인용하는 정보의 양에 질리곤 하지만, 그 정보를 요리하는 손놀림이 무디고, 안목이 처지는 것을 보면 그들이 정보의 바다에서 하염없이 표류하고 있다는 우려가 든다. 인터넷에서 서핑(surfing)이 아니라, 다 빠져 죽는 경우가 생기겠다는 우려인 셈이다.

 

 

3. 쾌락을 추구하는 글쓰기

왜 글을 쓰냐고 물으면, 짐짓 심각한 이유를 댄다. 그러나, 마음 바닥을 자세히 뒤져보면 글쓰기로 인한 쾌감이 거기에 있다. 인터넷 공간의 댓글 문화를 들여다 보면 그런 속 깊은 욕망이 비교적 정직하게 드러나 있다. 익명성에 기대어 맘껏 분출해 보는 것이다. 나는 그 쾌감을 억누르기보다는 적절한 방식으로 존중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다. 지적 욕구 혹은 표현의 욕구가 결코 인간의 기본적 욕망, 즉 식욕(食慾)이나 성욕(性慾) 보다 덜 절박하지 않다.

 

진리에 대한 추구나 헌신할 만한 가치를 탐구하는 것은 결코 쾌락과 배치되지 않는다. 성경은 계시(revelation)숨겨진 것이 드러남(apocalypso)으로 이해한다. 신약이나 구약에서 이 단어가 사용될 때는 인간의 경험적 지식이나 예상을 뛰어넘는 압도적인 초월의 경험으로 자주 묘사되었다. 이 계시의 순간을, 사람들은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고도 말하고, 기절하거나 환상을 보는 것으로 묘사하기도 한다. 강렬한 희열의 경험이기도 했다. 그것은 초월해 계시는 하나님과 소통하는, 혹은 그분의 임재를 강렬하게 체험하는 경험이기도 했다.

 

글쓰기를 통한 소통의 체험은 우리 신체나 관계의 확장을 경험하는 것이다. 나는 글쓰기가 공동체적 소통의 경험을 극대화 하는 한 방편이라고 믿는다. 특히 그리스도인의 글쓰기는 가장 적극적인 신앙행위의 하나로 역할을 한다. 나는 기존의 기독교 세계관 논의를 비판적으로 검토하던 와중에 내러티브(narrative) 구조를 통해 세계관 이야기를 더 쉽고, 명확하게 할 수 있겠다고 느꼈다. 세계관(worldview)이란 것은 기본적으로 이야기(narrative)이며, 그것은 추상화(abstractization), 개념화(conceptualization)란 방법보다 이야기됨으로써(being narrated) 가장 효과적으로 전달된다는 주장이다. 이를 다른 말로 설명하면,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God narrated = the Scriptures)을 통해 말씀되신 하나님(God was narrated = the incarnation) 만나고, 오늘날에도 말씀하시는 하나님(God is narrating = the Spirit)을 통해 그 이야기를 우리가 새롭게 하는 것(re-narrate)이다.

 

4. 글쓰기를 위해서

매체에 글을 적극 투고하라. 나는 대학3학년 때였던가 <신앙계>란 잡지에 글을 청탁받아 실은 적이 있다. 묘한 기분이었다. 내 이름을 달고, 내가 쓴 글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잡지에 실리는 기분. 영국에서 유학할 때에도 스스로의 삶에 리듬감과 긴장감을 부여한다는 취지에서 <복음과상황>에 연재글을 썼다. 그런데, 가끔 전혀 예기치 않은 곳에서 글을 읽었다는 사람을 만난다. 어떤 글들은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인터넷에 글쓰기는 종종 예기치 못한 논쟁으로 비화되곤 한다. 책임지는 글에 대한 요청은 점점 더 강렬해진다.

어떤 경우는 자신을 내비치는 글이 요구될 때가 있고, 그럴 경우는 정말 실존적 결단을 해야 한다. 어떤 경우는 매우 잘 계산된 방어적 글쓰기를 하게 될 때도 있다. 두세 합을 주고받을 각오를 하고, 논점의 강약을 조절하며 논쟁을 이끌어가야 하는 경우가 있다. 이런 경우 글쓰기는 마치 이종격투기와 같다. 자기 조절과 논리 개발이 피를 말리는 경우이다. 그런 글을 쓰면서 세상을 배우고, 인생을 실감한다.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어떤 때는 몸에다 삶을 새긴다는 생각이 든다. 그럴 때는 글쓰기가 바로 바디 피어싱(body piercing)이고, 문신(tattoo)이다. 어떤 흔적을 몸에 남기고들 사는가? 궁금하다


* 이 글은 2005년 1월 IVP 문서학교에서 행한 '글쓰기' 강의원고를 일부 다듬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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